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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해남방향으로 가게 되면 “3.1 운동 민족대표 양한묵 선생 생가”란 하얀 글자가 선명하게 씌어져 오가는 길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선생님께서는 3.1독립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호남출신이시다.
해남군에서는 양한묵 생가가 위치한 옥천면 영신마을을 2019년에 생가 복원과 함께 기념관 준공으로 독립운동 체험마을로 새롭게 단장해 왔다.
2030년까지 3.1운동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특성화 공간으로 조성하고, 지역축제 및 마을 행사와 연계 가능한 프로그램을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영신마을에는 선생님이 공부하던 ‘소심제’를 비롯해 사당 덕촌사, 1992년 세워진 자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 등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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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은 2019년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진 생가 및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복원된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당시 농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디딜방아와 장독대, 기존 생가터에 수령 15년의 감나무 등을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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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서대문 형무소의 외형을 본떠서 지은 건물로 양한묵 흉상, 독립 선언서 사본, 영상화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양한묵 선생 생가 주변과 추모탑 부근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1,200평 규모의 무궁화동산이 있어 무궁화 꽃이 피는 7월 이후에 는 무궁화 꽃을 감상하면서 선생님의 나라 사랑과 함께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선생님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또한 지강 양한묵 선생 독립운동 활동상에 대해 재조명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화 제작사 리치컴은 3.1운동을 맞이하여 전남 해남읍 해남 시내마에서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 꽃이여, 별이여’ 시사회를 가졌다.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옥중에서 숨진 양한묵 선생에 대한 생애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향후 뮤지컬 등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양한묵 선생은 1862년 4월29일 제주 양씨의 집성촌인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33인 중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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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에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부터는 불교, 선교, 천주교, 개신교 등에 대한 다양한 서적을 접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전국을 돌아 다녔는데, 이때 동학이 농민층의 지지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1895년 말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었고, 화순군 능주면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1897년 중국 북경 등지를 유람하였고, 189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혔다. 일본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과 교류하였으며. 1904년에 동학에 입교하면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9년 12월에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4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후는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여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여 천도교인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는데, 교리강습소 활동이 3.1 운동 시 각지의 천도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배경이 되었다.
양한묵 선생은 신문기사를 통해 미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중 1919.2.20. 권동진으로 부터 독립선언 계획을 듣고 적극적인 참여를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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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27일 김상규의 집에서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3.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56세의 나이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이 끝나기 전인 1919년 5월26일 사망하였다.
선생의 시신은 서울 수철리에 안장하였다가 3년 후에 전남 화순군 앵남리에 이장되었다.
*특별취재에 협조 해주신 해남군 문화관광해설사 전희숙님의 동행에 깊은감사를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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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본부장 윤은상 기자 kmetv8114@naver.com
2026.10.08(목) 09: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