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소통의 지혜
kmetv8114@naver.com
2024년 06월 05일(수) 16:00
논설위원 문민용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감옥인 바스띠유(Bastille)가 점령되면서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베르사이유(Versailles)궁중에 머물던 루이 16세는 인민들이 스스로를 프랑스 시민으로 선포하며 왕의지배에 반발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나 무력한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현실과 접촉하지 못한 루이 16세는국민들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태생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도 현실과 단절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식량 부족에대한 분노 소식에 대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어리석게 반응한 적도 있었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가속화되며 파리에서 무정부 상태가 일어나게 되어 국왕과 왕비, 가족들은 의회에 억류되었다가후에는 수감되었다. 그리고 결국 1792년 겨울, 그들은 하나하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이 안타까운역사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국민들과 소통하지 못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러온비참한 최후로 기록되었다.

19세기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중국과 일본은 서양 열강의군사적 압력에 굴복하여 1840년과 1854년에 각각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홍선대원군의 그러한 문호개방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조선이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에 적절한대응을 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져 외부 문화와 지식을 흡수하는 데 늦어져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는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조선이 자체적인 근대화와 발전을 위한 시도를 미뤄두는 원인이 되었다.

다른나라들이 외부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발전을 꾀하는 동안 조선은 이러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지않았다. 이는 조선이 외부 세계와 소통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나중에 일본의 침략과 병합을 불러올 원인이 되었다. 조선이 근대화를미뤄두고 일본의 군사적 강화를 무시한 결과, 조선은 후에 일본에 의해 병합당하게 되는 역사적인사건을 겪게 된 것이다.

조선과 달리 중국의 청나라는 19세기 중반에 서양 열강의 압력을 받아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러나당시 중국 내부는 보수적인 정책과 관습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 지식과 기술을 흡수하거나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근대화와 발전에서 큰 뒤처짐을 경험하게 되었으며,나중에는 열강들에게 약탈당하고 침략당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또한, 오토마나제국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기간에 걸쳐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문화적 차이와긴장을 경험했다.

이때 오토마나제국은 자체적인 근대화와 혁신을 시도하지 않고 전통과 종교적인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외부의 기술과 사상을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발전을 놓치게되었고, 결국 열강들의 압력과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립되어 고정된 관습과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발전을 막는 것 만이 아니라 갈등과 문제를 일으킨다.

이처럼 우리가 새로운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마음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면 더욱 발전하고자유로운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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