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당나라의 여류시인 ‘설도’를 생각하다.
국민환경방송 kmetv8114@naver.com
2024년 04월 25일(목) 18:33
전)광주광역시 교육연수원 총무부장 윤은상
따스한 봄이 오고 여기저기에서 개나리, 복사꽃, 벚꽃 소식이 들리니 원진을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여류시인 설도의 아름다운 삶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는 원진과의 이별 후에 ‘춘망사(春望詞)’라는 연시를 남겼다.

“꽃이 피어도, 함께 감상할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묻고 싶어라, 그리운 그대가 있는 곳, 꽃피고 꽃지는 이 시절에 사무치게 보고 싶어라.” (花落不同悲, 花開不同賞, 容問相思處, 花落時)
“춘망사”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는 그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또 무엇을 보아도 본 것 같지 않다는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 시이다.

1,000년 전에 지은 설도의 ‘춘망사’ 4수 중 3수를 소재로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번역하고 김성태가 작곡하여 “동심초” 라는 가곡으로 변하여 우리에게 불리우고 있다.

설도는 장안의 쓰촨성의 성도시의 홍도였다. 빼어난 용모와 글재주로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당대(唐代)의 문학사에서 여류시인을 언급할 때 ‘설도’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저명한 문학인이다.

유채춘, 어현기, 이야와 더불어 “당대 4대 여류시인으로 불린다. 또한 탁운문, 화예부인, 황아와 더불어, 촉중사대재녀‘로 일컬어진다. 지금도 90여 수의 시가 남아 있다. 832년, 그녀의 나이 6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듬해인 833년에 재상을 지낸 단문창이 그녀를 위해 직접 묘지명을 짓고 묘비에 “서천 여교서 설도 홍도 지묘“라고 썼다.

설도는 16세 때 자신의 용모와 음악, 그리고 문장력을 빌려 그녀의 이름을 악적에 올리고 관기가 되었다.

기생이 된 그녀의 명성은 금세 쓰촨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문장 외에 당시 백거이. 원진. 위고 등 명사들과 나눈 애정으로도 유명하다. 덕종 때 위고가 사천 안무사로 쓰촨지역을 다스리면서 그녀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는데 그녀를 술자리에 불러 시를 짓게 하고 ’여교서‘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기생을 ‘여교서’라고 불렀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31세의 원진이 좌천되어 감찰어사 신분으로 지방 순시를 갔다가 설도의 명성을 듣고 쓰촨 지역에 와서 그녀를 만났다. 당시 설도의 나이는 원진보다 11년 연상이었으나 두 사람은 시를 통해서 연애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석 달 동안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설도는 원진과 애정을 나누며 100여 편의 연시를 남겼다. 두 사람의 연애는 당시 큰 화재였다. 중년의 설도는 이상적인 젊은 원진에게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깊이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얼마 지나서 이때 서로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정표로 삼으며 이별을 예고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한다고 책망하면서 자기의 질녀에게 혼인하기를 바랐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는데 위씨녀가 원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렸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와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 위씨가 원진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설도와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이 난세의 신세가 되었다.

서로가 나이와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진은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서로의 애정은 그렇게 끝났다.

설도는 시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원진에게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도는 직접 만든 붉은 종이에 시를 써 보냈는데, 훗날 많은 사람들이 모방했다고 한다. 이 종이를 후세 사람들이 ‘설도전‘이라고 불렀다.

설도는 40세가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나 이미 그때는 시들어진 꽃이었다. 그 뒤 금강나루에 떠나는 원진을 만났지만, 서로는 아무 말없이 이별을 한다. 그 이후 원진은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지고 설도는 절대로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홀로 지냅니다. 그 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일편단심으로 그를 사랑했다고 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녀는 지금의 쓰찬성 청도(성도)시의 서쪽교외에 있는 완화계로 거처를 옮겼으나, 세상이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아 다시 완화계를 떠나 벽계방으로 옮겨 음시루라는 누각을 짓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쓰촨성 성도시의 망강루 공원에 설도의 무덤과 그녀의 이름을 딴 우물 ‘설도정’이 있다. 설도정의 물로 빗는 술은 ‘설도주’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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