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령의 첫사랑 특별취재 본부장 윤은상 기자 kmetv8114@naver.com |
| 2023년 02월 06일(월) 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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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었던 철종이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두메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게 되었던 배경에는 그의 증조부인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서자)이면서도 원범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결국 순조 때 사사되는데 아들인 전계대원군(원범의 아버지)마저 역모 사건에 휘말려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가족들이 강화도로 피신해서 왕족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농사꾼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강화에서 양순이라는 천민의 처녀와 혼약을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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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첫 사랑길<사진=본사 특별취재본부장 윤은상기자 촬영>
원범은 한양에서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자신에게 역모죄를 씌워 해하러 온 사람인 줄 알 알고 숨어버렸으나 왕으로 모시러 왔다 하여 따르게 됩니다.
당시 모시러 온 분은 영의정 정원용이었는데 원범은 궁에 입궐하여 대왕대비인 순원 왕후에게 인사를 한다. 궁중 생활을 익히기 위해 대전의 제조상궁에게 궁중의 법도와 예법을 배운다.
선왕의 3년 상이 끝나자 대왕대비의 집안인 안동김씨의 15세의 규수와 혼례를 올리게 되는데 그녀가 철인왕후이다. 왕후는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항상 검소하고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잘 챙겼다.
집안의 세도를 믿고 경솔히 나서지 않았고 매사에 신중하여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대왕대비의 호의를 얻었다. 철종은 혼례를 하였음에도 마음은 온통 양순이를 그리워하다가 양순을 입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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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외삼촌 염보길이 살았던 외가집 전경<사진=본사 특별취재본부장 윤은상기자 촬영>
이를 걱정하는 대왕대비는 양순에게 왕을 생각해서라도 대궐을 떠나되 왕에게 알리지 말고 떠나라고 한다. 양순은 “아버지 기일도 다가오고 어머니도 뵙고 다시 오겠다.”라고 말하고 떠났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궁궐을 완전히 떠났음을 왕이 알게 된다.
철종은 양순이 떠난 후 상심하여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중전은 대왕대비에게 양순을 다시 불러줄 것을 청하지만 대왕대비는 허락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중전은 대전별감을 시켜 은밀히 양순을 데려와 주막에서 임금과 만날 수 있도록 명한다. 양순이 임금을 주막에서 몰래 만났다는 사실을 대왕대비가 알게 되고 대왕대비의 노여움을 받아 양순은 다시 강화도로 떠난다.
왕이 천민인 양순에게 정을 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불우했던 시절의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 왕가의 생각이었다. 철종은 양순과 헤어진 비탄을 이기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삼정의 문란과 국가의 잇따른 민란을 자초하기에 이른다.
임금은 술에 빠져 지내다가 병을 얻게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양순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오르며 세상을 하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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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쳐했던 강화도의 용흥궁 <사진=본사 특별취재본부장 윤은상기자 촬영>
일설에 의하면 평범한 시골 처녀인 양순은 궁궐로 따라갈 수 없는 처지이기에 철종은 양순에 대한 상사병과 엄격한 궁중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름시름 앓아 몸을 가누지 못하고는 일이 잦아지자 헌종비 효현왕후와 익종비 신정왕후를 비롯한 왕가의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어 양순을 독살시켰다고 한다.
당시에는 안동김씨 일족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므로 당파 간에 유지되었던 권력의 균형과 견제의 원리가 무너지면서 과거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며 매관매직 등 관리들의 부패가 더욱 심해져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져 민란이 발생하는 등 나라가 극히 어지러운 지경에 빠뜨렸고 결국 고종에 의해서 조선의 500년 사직이 무너지게 됩니다.
철종은 세도정치의 계산으로 선택된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좌에 오를 후손이 없어져 직계후손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방계 중에서 우선순위에서 뽑힌 것이다.
정치 능력에 있어서도 어릴 때부터 궁중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후계자 교육을 받은 다른 왕손과는 달랐을 것이다.
처음 몇 년간은 순원 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고 이후에 직접통치를 했다고는 하지만 강고한 세도정치에서 발판도 배경도 없었던 왕이 느꼈던 무력감은 켰을 것이다. 허울뿐인 왕으로 무력감과 좌절감이 술을 가까이하고 일찍 요절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별취재 본부장 윤은상 기자 kmetv8114@naver.com



